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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pective

무신론자가 말하는 '믿음'의 쓸모

by blnk-space 2026. 1. 22.

1. 파스칼의 내기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교회도, 절도 다니지 않는 철저한 무신론자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무언가를 간절히 믿는 사람들의 눈빛을 좋아한다. 그 흔들림 없는 평온함이 가끔은 부럽기도 하다.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은 재미있는 도박을 제안했다. 이른바 '파스칼의 내기'다. 그의 논리는 간단하다. 신이 존재한다는 쪽에 돈을 걸면, 이겼을 때의 이득은 무한대고 졌을 때의 손해는 미미하다. 그러니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믿는 쪽에 베팅하라는 것이다.

2. 신이 없어도, 믿음은 남는다

하지만 나는 파스칼의 논리가 조금 다르게 읽힌다. 천국에 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믿는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불확실함 투성이다. 그 불안한 망망대해에서 '믿음'은 우리를 지탱하는 닻이 되어준다. 그 대상이 신이든, 신념이든, 혹은 자기 자신이든 상관없다. 무언가를 굳건히 믿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은 폭풍우를 견딜 힘을 얻는다. 설령 죽어서 가보니 신이 없었다 한들, 살아있는 동안 그 믿음이 나를 살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3. 믿음인가, 우상인가?

다만, 여기에는 서늘한 경계선이 하나 있다. 믿음이 과도해져서 '나(Self)'를 집어삼키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믿음이 아니라 '우상'이 된다는 점이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산에서 내려와 "신은 죽었다"고 외쳤다. 많은 사람이 이를 단순히 종교 비판으로 오해하지만, 차라투스트라가 진짜 깨부수고 싶었던 것은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모든 종류의 맹목적인 복종'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신이 떠난 자리에 또 다른 절대자를 세우고 숭배하는 것을 경계했다. 나를 잃어버린 채 무언가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것. 그것은 구원이 아니라, 차라투스트라가 그토록 경멸했던 '낡은 우상'을 다시 세우는 과오일 뿐이다.

4. 마치며 : 나를 위한 믿음

진짜 건강한 믿음은 '나'라는 주체가 바로 섰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신을 위해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단단하게 살아가기 위해 믿음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차라투스트라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내 안의 주인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우상을 앉혀서는 안 된다. 나의 존엄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내가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기둥.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 있는 믿음이라면, 무신론자인 나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어쩌면 우리가 믿어야 할 가장 확실한 신은, 어떤 우상 앞에서도 무릎 꿇지 않고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낸 거울 속의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