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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pective

타인은 지옥이다 : 우리는 왜 지옥을 구걸하는가?

by blnk-space 2026. 1. 21.

타인의 시선은 나의 자유를 뺏는 감옥이다.

 

1. 지옥의 진짜 의미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는 그 유명한 대사가 나온다. "타인은 지옥이다. (L'enfer, c'est les autres)"

많은 사람이 이 말을 오해한다. 단순히 "저 인간 때문에 스트레스받아 죽겠네" 정도의 인간관계 회의론으로.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한 지옥은 훨씬 더 서늘하고 근원적인 공포다. 바로 '시선(The Gaze)'이다.

 

 상상해 보자. 아무도 없는 복도에서 내가 열쇠 구멍으로 남의 방을 훔쳐보고 있다. 이때 나는 온 우주의 주인이다.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세상을 해석하고 판단한다. 나는 온전한 주체(Subject)다.

 

 그런데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나를 봤다.

그 찰나의 순간, 나는 '세상을 보는 주인'에서 '훔쳐보다 들킨 변태'로 전락한다. 나의 세계는 무너지고, 나는 저 사람이 정의하는 대로의 객체(Object), 즉 사물로 굳어버린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지옥'이라고 불렀다. 나의 자유가 타인의 시선에 의해 난도질당하고, 타인이 규정하는 대로 내가 박제되는 것. 그것이 지옥이다.

2. 자발적 수감자들 (Instagram의 역설)

 그런데 21세기를 사는 우리는 참 기이한 행동을 한다. 사르트르의 말대로라면 우리는 그 지옥(시선)으로부터 도망쳐야 마땅하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스마트폰이라는 작은 창문을 열고, 전 세계 사람들을 향해 소리친다.

 

"제발 나를 좀 봐주세요. 나를 판단해 주세요."

 

 인스타그램에 올린 사진에 '좋아요'가 눌리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타인의 시선이 나를 '행복한 사람', '잘나가는 사람', '힙한 사람'으로 규정해 주기를 갈구한다. 사르트르가 보기에 현대인은 제 발로 감옥에 걸어 들어가, 간수들에게 "왜 나를 감시하지 않냐"고 따지는 꼴일 것이다.

우리는 왜 이토록 지옥을 사랑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스스로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가 관심을 구걸한다.

3. 마약이 된 시선

 물론, 현실적인 반론도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남 신경 끄고 살아라"라는 말은 쿨해 보이지만, 무인도에 사는 로빈슨 크루소가 아닌 이상 불가능한 주문이다.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위치를 확인하고, 타인의 인정을 통해 자존감을 채우기도 한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만큼이나, 타인이 나를 사랑해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본능이다.

 

 하지만 문제는 비율이 무너졌을 때 발생한다.

건강한 자아는 '내가 정의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가 공존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정의할 힘을 잃어버린 것 같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스스로 묻고 답하는 과정은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반면 타인의 시선은 즉각적이고 자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타인의 시선을 단순한 참고 자료가 아니라, 나를 지탱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삼아버렸다. 그것은 마치 마약과 같다. 타인이 "너 멋지다"고 해주면 내가 존재하는 것 같고, 관심이 끊기면 내 존재 자체가 지워지는 것 같은 공포. 우리는 타인의 시선이 두려운 게 아니라, 타인의 시선이 없을 때 마주해야 할 텅 빈 '나'가 더 두려운 것일지도 모른다.

4. 지옥과 천국 사이에서

지옥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나를 지킬 수는 있다.

결국 타인은 지옥이 맞다. 그들의 시선은 나를 멋대로 재단하고, 오해하고, 가둬둔다. 하지만 동시에 타인은 내가 실재함을 확인시켜 주는 거울이기도 하다.

 

 중요한 건 그 지옥불에 뛰어들어 타다 남은 재가 되지 않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 - 좋아요, 평가, 뒷담화 - 을 내 존재의 전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 "그건 너의 생각이고, 나는 나야"라고 말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마음의 방 하나는 남겨두는 것.

우리는 사회 속에 살기에 지옥을 피할 수는 없다. 다만, 그 지옥을 구걸하는 노예가 될지, 그 속에서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여행자가 될지는 여전히 나의 자유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