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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pective

Tabula Rasa, 우리는 무엇으로 채워지는가

by blnk-space 2026. 1. 17.

타불라 라사(Tabula Rasa)

 

1. 로크 vs 데카르트

 사회계약론 하면 홉스, 루소와 함께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이름, 존 로크(John Locke). 사회 시간에 '백지설'이라는 이름으로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원어로는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인간은 태어날 때 아무것도 없는 빈 서판과 같다는 주장이다.

 

 재미있는 건, 이와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 바로 데카르트라는 점이다. 데카르트는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신의 개념이나 논리적 사고 같은 본유관념(Innate Ideas)을 탑재하고 세상에 나온다고 보았다. 한 명은 "텅 비었다" 하고, 한 명은 "이미 깔려 있다" 하니, 만약 둘이 동시대에 만나 토론했다면 아주 볼 만했을 것이다.

2. 현실적인 의문 : 유전자는 장식인가?

 로크의 주장은 낭만적이다. 인간이 백지라면, 우리는 노력 여하에 따라 무엇이든 그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기니까. 하지만 살아가면서 문득 현실적인 의문이 든다. 정말 우리는 100% 백지일까?

 

 백지라기엔 유전자(DNA)의 힘이 너무 강력해 보일 때가 많다. 모차르트는 5살에 작곡을 했다는데, 이건 빈 서판이 아니라 이미 명작이 그려진 채로 태어난 것 아닌가? 운동신경이나 예술적 감각, 기질 같은 것들은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밑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모차르트까지 갈 필요도 없이 한국에도 영재로 불리는 사람들의 사례는 많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들을 보며 모든것은 DNA에서 온다고 생각해야 할까?
 
심지어 최근의 과학은 타불라 라사를 비웃는 것 같기도 하다. 유전자 가위(CRISPR) 기술이 등장하면서, 이제는 인간의 지능이나 신체 능력을 유전자 단위에서 조작할 수 있는 시대가 오고 있다. 마음만 먹으면 태어날 때부터 IQ를 높게 설정한 '맞춤형 아기'가 가능한 세상. 유전자로 모든 것이 조작 가능한 세상에서, 과연 '환경'이라는 게 쓸모가 있을까? 우리는 그저 코딩된 대로 살아가는 기계에 불과한 건 아닐까 하는 서늘한 의심이 든다.

 

타고난 것인가, 만들어진 것인가

3. 인류학적 반박 : 그럼에도 경험이다

 하지만 시야를 '나'라는 개인에서 '인류'라는 종으로 넓혀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만약 데카르트의 말대로 인간이 완벽한 이성과 논리를 태초부터 '탑재'하고 태어나는 존재라면, 인지혁명 이전의 인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불을 발견하기 전, 언어가 정립되기 전의 인간은 동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선천적으로 완성된 이성을 가지고 태어났다면, 인류는 태초부터 문명을 지배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못했다.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인류가 지구의 지배자로 군림하게 된 계기를 '인지 혁명'으로 꼽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힘, 뒷담화와 거짓말, 그리고 신화. 이러한 허구를 공유하는 능력이 생기면서 인류는 비로소 문명을 건설했다.

결국 우리가 '지성'이라고 부르는 소프트웨어는 처음부터 깔려 있던 게 아니다. 오랜 시간 환경과 부대끼며 쌓아 올린 데이터의 축적, 그리고 인지혁명이라는 우연한 돌연변이적 작용이 빈 서판 위에 후천적으로 깔아둔 결과물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환경도 맞는거 같고 DNA도 맞는거 같다. 그래서 나는 나름의 절충안을 내렸다.

"인간은 20%의 DNA와 80%의 환경으로 이루어진다."

 DNA라는 씨앗은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 씨앗이 싹을 틔울지, 어떤 나무로 자랄지는 전적으로 80%의 환경과 경험이 결정한다. 아무리 좋은 씨앗도 척박한 땅에서는 자라지 못하고, 평범한 씨앗도 좋은 숲을 만나면 거목이 되듯이.

4. 나를 위한 핑계

 백지론이 맞을지 틀릴지, 사실 나는 모른다. 그건 아마 그 누구도 명확히 꼬집어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인간이 100% 유전자로만 정해진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유전자가 씨앗이라면, 환경이 중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변치 않을 테니까.

 이러한 맥락에서, 나는 타불라 라사를 '나를 위한 위로, 혹은 핑계'로 삼아보려 한다. 우리는 종종 멈춰있는 시간을 불안해하고, '휴식'을 게으름이라는 치부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환경이 나를 만드는 것이라면, 휴식이야말로 나를 둘러싼 환경을 돌아보고 수정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 아닐까?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기보다, 때로는 멈춰 서서 우리의 환경을 점검하는 것. 나의 빈 서판(Tabula Rasa)을 잘 채우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잠시 비워두는 여유가 필요한 법이다.